1904년 하야시는 고종을 알현하면서 한일의정서의 조인을 강압할때 그의 위세에 눌린 대신들은 감히 반대하고 나서지 못했다.
이지용 (을사오적)
그때 이용익만은 달랐다. 그는 고종을 설득해 외부대신 이지용과의 담판을 허락받았다. 이용익이 이지용을 만나 이같이 엄포를 놓았다.
이용익: “의정서에 조인하면 당신은 만고의 역적으로 역사에 기록될 뿐만 아니라 이내 대역죄를 범한 죄인으로 처단될 것이오”
이지용: “누가 나를 처단한단 말이오!”
이용익: “2000만 민족은 모두 죽은 줄 아시오? 대감, 2000만 민중 가운데 의혈청년 하나 없다고 장담할 수 있겠소. 폐하도 이 의정서 조인을 원치 않고 있소. 대감이 하야시 공사에게 분명히 잘라 거절하시오. 정 어려우면 조인식 날짜를 미뤄 우선 시간이라도 벌도록 하시오”
이지용: “알겠소. 내가 어떻게 해서든 시간을 끌 터이니 이후 문제는 대감들이 책임지시오”
그러나 이들의 대화 내용은 곧바로 하야시에게 전해졌다. 하야시가 한 시간도 채 안 돼 이지용을 찾아가자 이용익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때 이용익은 기차에 실려 인천으로 끌려간 뒤 다시 일본 군함에 옮겨지고 있었다. 이용익의 반대를 두려워한 일본 측이 주권국가의 대신인 그를 강제로 납치해 간 것이다.
이용익이 일본으로 끌려가는 동안 일본은 한일의정서를 체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