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글에서는 수메르 문명을 구성한
도시 중 하나인
우르에 대해 소개해보려고 해
우르는 충적평야 지대와 사막의 경계선에 입지한 도시로서
기원전 4000년경 최초로 주민들의 거주 흔적이 발견되는 곳이야
이 도시는 기원전 2500경부터 우르 제1왕조의 왕들에 의해
메소포타이마 남부의 중심지로서 그 기능을 하였어
또한 우르를 발굴한 후 만들어진 지형도를 보면
구릉지 서측과 북측으로 항만시설이 입지해 있어서
우르가 운하에 의해 연결된 도시임을 알려주지
이곳의 통치자들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은
우르 제3왕조의 창시자
우르남무로서
그는 함무라비 이전에 이미
우르남무 법전으로 불리는 법전을 편찬했으며
우르의 지구라트를 건설한 군주야
우르의 무역업자들은 오늘날의 바레인인 딜문과 오늘날의 오만인 마간과 무역을 하였으며,
멀리 북쪽의 에마르와 에블라
그리고 지중해의 우가리트
심지어 더 멀리는 인더스 문명사람들과까지 교역하여
우르에는
이국풍의 음식이나, 향기로운 나무, 과일과 허브, 산업을 위한 천연자원, 건물의 보, 배를 건조하기 위한 목재, 거대한 양의 구리, 귀금속, 식용기름, 상아 등이 수입되고
이러한 물품들은 울로 된 의복과 울로 된 천, 보리, 밀, 야자, 생선기름, 말린 물고기, 가죽 등으로 그 대금이 지불되었어
* 우르의 경제체제에서 사원은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데, 예컨대 대량의 울로 만든 의복과 옷감은 사원에서 제조됨
* 십일조 또한 사원의 중요한 수입원으로서 우르의 무역업자들은 딜문으로의 여행이 끝나면 십일조를 사원에 바쳤고, 설령 여행이 성공적이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다음 사람이 성공할 것을 기원하는 기여금을 내야했어(무역업자가 우르시민이건, 딜문시민이건 상관없이 이런 십일조는 모두가 내야만 했음)
* 물론 사원뿐 아니라 우르의 궁정도 무역에 관여하였지
우르의 영광이 끝난 것은 엘람인들에 의해 서로
우르 제3왕조는 5대 107년 만에
수메르인들의 숙적 엘람의 공격으로 멸망함
그리고 우르는 오랜 시간 방치되었지만,
수메르 문명이 끝난 한참 후에도
이곳의 역사적, 입지적 중요성을 꿰뚫어본
고대 오리엔트 통치자들이 있어서
신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에 의해
우르는 재건되었으며
그의 아들이자 신바빌로나아의 마지막 군주 나보니두스는 우르의 지구라트의 높이를 7층으로 높였고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제 또한 우르의 보수, 재건에 힘써 탑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기도 했어
우르는 이후 시간의 풍상 속에 다시 오랜 세월 잊혀졌지만,
18세기에 이르러 다시 세상에 그 존재를 드러내고
1차 대전 이후 영국인 울리(그의 대영박물관 팀과 미국의 펜실베이니아 대학팀의 공동작업을 함)의 주도로 본격적으로 발굴되었는데,
발굴팀의 노력으로 우르는 다시 그 찬란했던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게 되었지
*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수메르의 찬란한 유산들 중 많은 것이 이 우르 도시민들의 작품이야
푸아비의 하프
우르의 왕비로 추정되는 여성의 무덤에서 발굴된 하프로
현재까지 발굴된 악기 중 가장 오래된 것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음
푸아비의 실린더를 포함한 그녀의 무덤에서 발굴된 화려한 유물들
기원전 2600년경에서 기원전 2500년경의 유물들이야
* 푸아비 무덤의 발굴을 통하여 우리는 우르의 화려한 모습과 함께 어두운 부분 또한 알 수 있는데... 그녀를 위해 많은 사람들이 순장되었음 또한 이 발굴작업을 통해 확인되었어
우르의 군기
조개와 홍옥수 및 라파스라줄리를 상감한
기원전 2800년경에서 기원전 2400년경의 작품
전쟁을 묘사한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서
앞면에는 전쟁의 참상이
뒷면에는 평화로운 도시의 모습이 나타나 있어서
전시와 평시의 모습을 대조시켜 우르의 주민들에게 경각심을 주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작품으로 평가받아
우르의 지구라트
상술하였듯이 기원전 2100년경 우르남무에 의해 건설된 지구라트로서
현존하는 지구라트 유적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 평가받으며(비록 이 지구라트도 완벽한 모습으로 남아있는 것이 아니더라도...)
우르인들은 지구라트의 위용을 높이기 위해 벽돌이 구워지기 전에 화려한 물감들을 진흙 속에 섞어 사용(그래서 지구라트의 하부 밑부분은 검은색을 띠고 있으며, 윗부분은 붉은색이 사용됨)했고
또한 구조물의 주요 윤곽선에 곡선을 사용하여 시각적 안정감과 함께 착시현상을 예방했어
이 지구라트의 본래 규모는 65미터 곱하기 43미터의 직사각형 형태로
각 꼭짓점은 동서남북의 방향을 가리키며
총 네 개층의 구성되어 있었어(상술하였듯 후일 나보니두스가 7층으로 증축)
첫 번째 층은 9.75미터
두 번째 층은 2.5미터
세 번째 층은 2.3미터
네 번째 층은 4미터의 높이로 이뤄졌으며
지구라트의 가장 낮은 부분에만 720,000개의 구운 벽돌이 사용되었어
* 우르의 지구라트에서 평면을 구성하는 조형원리로 마스터패턴과 사각형의 단순한 기학과 더불어 루트 2의 근삿값에 해당하는 1:41421296을 이용한 비례체계가 사용되었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다시 한번 수메르인들의 뛰어난 수학적 능력과 건축술을 엿볼 수 있지
* 글을 마칩니다.
* 읽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